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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학년도 5회_ 장려상] 괜찮지만 괜찮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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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리끼리, 유유상종이라는 단어보다 산뜻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만, 좌우지간 그간 내 우울과 방황은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한때 모진 대학 생활과 꿈을 함께하던 친구와 떠들던 우악스러운 위악을 떠올린다. 다자이 오사무의 우울증 따위는 아침에 냉수마찰하고 기계체조를 하면 싹 낫는다는 미시마 유키오의 말에 관해 이야기했다. 정작 미시마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일본의 전후 사회상에 비추자면 그의 말로는 우습게도 다자이의 죽음과 거울쌍이지 않냐고 비웃었다. 그러면서 학교의 산책로를 몇 시간을 왕복한 것은 수조에 갇힌 돌고래의 정형행동을 닮아있었다.

내가 그 방황 끝에 도달한 곳은 이곳이었다. 몸과 마음을 의탁한 꿈이 좌절하고 내게 남은 것은 시험 성적뿐이었고, 그 덕에 모두가 선망하는 이곳으로 운이 좋게 도망쳐왔다.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기본서와 문제집들이 이미 망가진 마음을 짓이겼다. 일기장에는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다는 말을 도망친 자에게는 그 어느 곳도 낙원일 수 없다고 고쳐 썼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달라는 내 물음에 정신과 의사 선생님께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냐고 반문하셨다. 그것은 미시마의 괴팍한 말과는 전혀 다른 결의 따뜻한 이야기였지만, 그 물음을 건넨 나는 미시마와 달리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 내가 내게 쥐여준 해법은 간단했다. 우울하다면, 우울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이곳에 진학하게 된 동기와 과정이 어찌 됐든, 내가 달고 지내는 ADHD, 수면장애, 우울증이니 하는 것이 어떻든, 지금 해야 할 일을 성실히 하면 된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제때 밥을 먹고, 꾸준히 운동하고, 사람을 만나며 공부를 미루지 않고 열심히 한다. 그래도 우울하다면 약을 먹으면 될 일이다. 그러면 우울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울은 경로의존성을 갖는 습관이다. 우울했던 과거의 궤적은 다시금 우울한 현재로 수렴한다. 자연스레 우울한 미래를 상상한다. 어제 공부하지 않았던 내가 오늘 공부할 수 있을까. 내일은 할 수 있을까. 변호사시험을 볼 수는 있을까. 아무런 이유 없이 나타난 우울은 꼬리를 물고 물어 그 이유를 스스로 만든다. 내가 어제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공부를 할 수 없다. 어제의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일은 오늘의 공부를 해야 한다. 친구들은 내일의 공부를 어제 했다. 그리하여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 우연히 상담센터를 찾게 됐다.


상담센터를 다닌 10주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이었다. 이래서 공부를 못하고, 저래서 사는 게 힘들다고 말했지만 늘 그런 건 아니었다. 상담센터를 찾아와 그럼에도 잘할 수 있다고, 멋지게 살 수 있다고 연기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고, 그렇게 한껏 부풀린 자신감으로 하루 이틀은 생활에 성실히 임할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잘 해왔고, 잘할 수 있고, 괜찮으니까. 부모님도, 친구들도, 교수님들도 나에게 진심 어린 지지를 보내왔고, 좌우지간 성실하게 공부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 끊임없이 자기최면을 걸면서 내 상태를 부정하려고 안달했다. 계획표를 수십 번을 썼고, 또다시 수십 번을 미루고 수백 번을 좌절했지만, 이제라도 열심히 산다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우겼다.

그리고 문제는 반복됐다. 상담센터를 2, 3주 다닌다고 삶이 곧장 달라지진 않았다. 해야 할 일을 여전히 다 하지 못했고, 열심히 살지도 못했다. 그 와중에 겨우 해낸 공부도 잘 해내지 못했다. 때로는 내 계획이 과하지 않았는지,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했고, 대뜸 내가 앓는 ADHD와 관련된 논문을 뒤적거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내 삶을 어떻게든 설명하고 고쳐보려는 생각에 또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내가 빠진 우울의 수렁에 갇혀 헤맸다.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상담 선생님과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은 내가 괜찮기를 바라고 있을 뿐 아니라, 잘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고, 다만 차근차근 천천히 할 수 있는 만큼 살아가면 된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춰 ‘잘’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면 안 된다…. 수 차례 상담에서 기억에 남긴 문장들을 얼기설기 엮다 문득 학부를 다니던 시절에 받은 교수님의 메일이 떠올랐다.


학부 1학년 2학기 때 일이었다. 중간고사를 잘 보겠다는 마음에 어리석게도 며칠을 꼬박 밤을 새다 잠들었고, 한 교양 수업 시험에 가질 못했다. 그 누구보다 수업에 열심히 참여했던 나를 교수님께서 애타게 찾으셨다는 친구의 전화 한 통에 잠을 깨고는 책상 앞에 앉아 메일을 쓰기 시작했었다. 무슨 핑계를 대야 할까, 솔직하게 이 모든 걸 실토하면 혹시 기회를 주지 않으실까, 날짜를 착각했다고 해버릴까… 숱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는 것 외에는 어떤 말씀도 드리지 못했다.

교수님께서는 제 죄송하다는 짧은 메일에, 인생을 거의 다 살고 난 지금에서야 깨달았다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긴 답장을 보내오셨다. 젊은 시절, 가장 중요한 순간에 일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적이 여럿 있었다. 혹시나 나에게 닥쳐올 실패를 어쩔 수 없는 일로 만든다면 나를 덜 비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모든 걸 망쳐버리고는 휴, 하고 안도했던 게 아닐까. 학생은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우려가 담긴 글이었다.

이 메일을 한참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고 상담센터에 찾아갔다. 어쩌면 내가 지금 학교생활을 포기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쩌면 닥쳐올 실패를 어쩔 수 없는 일로 만들고 싶어서, 내 잘못이 아닌 일로 만들고 싶어서, 내 하루하루가 내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망가지게 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고 말을 꺼냈다.

선생님께서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 한다고 하기엔 그간 내가 얼마나 ‘잘’ 살기 위해 노력했는지 스스로 알지 않냐고 반문하셨다. 일전에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이었지만, 그 순간부터 상담센터에서 나누던 이야기들이 하나씩 마음에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수십 번을 계획표를 쓰고 수백 번을 미뤘던 날들에 내가 얼마나 스스로 미워했는지만을 떠올렸구나, 그러면서도 스스로 잘하고 싶었던 마음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었구나. 어쩔 수 없이, 할 수 없이, 주어진 현실을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사랑하고 ‘잘’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이구나. 내 삶은 열심히 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나 그 자체구나. 괜찮은데,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나 지금 괜찮지 않구나. 그래서 꿈과 희망을 품고 도전한 이곳을 도망쳐온 곳이라 믿으면서 스스로 괴롭혀왔구나. 주변에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구나.


대학원 1학년 생활을 완전히 그르치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깨달았다는 것이 조금은 야속하지만, 결국에 나는 스스로 괜찮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서 괜찮아지고 있다. 다시 책상 앞에 앉을 수 있게 되었고, 활자를 눈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지나간 시간을 그만 잊기에는 잃어버린 1년이 뼈저리게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걸 느끼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지만, 한편으론 그 1년도 허무하게 날려버린 시간이 아니라, 내가 괜찮지 않음을 받아들이고 조금 더 단단하게 현실을 견뎌낼 힘을 키우는 시간이었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방법은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 인식하는 일이다. 이래저래 내 아픔에도 많은 이유가 있었겠고, 그 이유 하나하나를 고치려고 노력하면서도 내가 스스로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는 걸 상담센터를 다니면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난 스스로 미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내 삶은 ‘잘’해야만 하는 숙제가 아니라, 그저 부단히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며 스스로 사랑하는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주신 약은 내가 현실을 버티는 데 큰 도움을 줬지만, 상담센터에서 상담 선생님과 나눴던 이야기들은 내가 내 삶을 버티지 않아도 되게끔 도왔다. 비록 자신이 한편으로 못나고 부족하더라도, 나는 그럼으로써 괜찮지 않음에도 괜찮으니까. 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신 상담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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