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학년도 6회_ 우수상] 비빌 언덕 하나
- 작성자박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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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4년은 제게 유독 춥게 느껴졌습니다. 강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게 되면서 행복했던 것도 잠시, 자신감 넘쳤던 지난날의 포부들은 빠르게 움츠러들었습니다.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던 제게 법학은 낯설게만 느껴졌고, 강도 높은 학습량과 경쟁상황에 점차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불안감은 반복되는 실패와 성적 부진을 통해 무기력감으로 번져가 저의 자존감을 완전히 망가뜨렸습니다. 더군다나 춘천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한없는 이방인으로 전락한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에 늘 교내 법학도서관 건물에 붙어있던 전단지가 하나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힘들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문구가 담긴 심리상담센터의 연락처였습니다. 그 전단지를 한동안 마음에 담아두고만 있다가, 견디지 못할 만큼 지쳤던 어느 날에 상담을 신청했습니다. 당시에는 상담을 한다고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습니다. 주변 동기들은 잘만 버티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유난을 떠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은 마음으로 상담센터에 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선택이 제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게 교내 상담은 마지막으로 비빌 언덕 하나였습니다. 이전에 교외 병원에서 정신과 진료를 지속적으로 받았으나 차도가 없었고, 사설 상담센터의 가격은 학생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교내 상담을 통해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하는 어려움들을 해석하고 풀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1. 내가 겪었던 심리적 어려움
당시에 제가 겪었던 어려움의 팔 할은 학업 스트레스로부터 기인했습니다. 대학원에 입학하기 이전까지 항상 높은 학업성취도를 얻었던 것과 다르게, 이곳에서는 갖은 노력을 다하여도 뒤처지기만 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법학전문대학원의 특성상 교내 시험에서의 부진은 곧 변호사 시험의 불합격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부담감이 점차 커졌습니다. 불안감에 더욱 잠을 줄이고 학습량을 크게 늘렸으나 부진한 성적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생활이 1년 반 넘게 지속되면서 육체적인 피로와 무기력감이 심화될 뿐이었습니다.
당초 공익변호사를 꿈꾸며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였지만 학업에 지치다 보니 꿈같은 것은 기억도 잘 나지 않았습니다. 늘 놀란 듯이 잠에서 깨어나 대체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멍하고 얼떨떨하기만 했습니다. 그러한 불안정한 심리상태가 지속되면서 외부 자극에 극도로 예민해진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소음이나 불편함에도 크게 힘들어졌으며,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생활 전반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끝없이 밀려드는 시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어려움에 귀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2. 내가 상담을 통해 이루어낸 변화
제가 경험한 상담은 스스로가 직면한 문제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평가하고 해결책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마치 마음속의 대청소를 하듯이 처음에는 막막하기만 했지만, 묵은 먼지들을 털어내다 보니 나름의 길이 보였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발견한 저의 큰 문제점은 자신의 감정을 거의 돌보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상담 첫날부터 저를 당황시켰던 질문은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였습니다. 특이할 것 없는 질문이었지만 저는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황당하게도 그동안 자신의 감정에 관심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니 늘 감정보다는 성과가 중요했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희생시키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감정 같은 것은 지나가면 사라져버리는 반면에, 성과는 데이터로서 영원히 남는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상담을 진행하면서 전혀 다른 생각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습니다. 내가 건강하게 존재하지 못한다면 성과 같은 것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할 텐데, 작은 것에 집착하다가 큰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돌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요소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는 점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의식 위로 떠올려서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그동안 자폐성 장애인의 형제로서 살아가면서 과도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런 와중에 가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커져갔다는 사실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상담 회차를 거듭하면서 나를 괴롭히던 막연한 감정들이 구체적으로 정리되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가 점차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동안의 어려움들을 해석하고 풀이한 결과, 상담 선생님의 조언을 토대로 나름의 대응책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우선적으로 타인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려는 태도를 의식적으로 내려놓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나약하고 별 볼일 없는 스스로를 내보이게 될 때마다 초조한 마음이 드는 한편, ‘당연히 그럴 수도 있는 거’라며 반복적으로 되뇌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진 자원들을 적극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나를 지지해주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내가 가진 어려움을 적절히 털어놓는 법도 연습했습니다.
그렇게 상담기간 동안 매주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며, 좋은 습관을 체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물론 상담을 마치고 반 년 정도 지난 지금, 때때로 스스로를 지나치게 혹사시키곤 합니다. 이번 기말고사 시험기간에도 잦은 밤샘과 컵라면으로 자신을 몰아세운 적 있습니다. 그렇지만 힘든 순간이 닥쳐올 때마다 지난 약속들을 떠올리고, 제가 터득한 방법들을 조금이라도 실천하려 합니다. 덕분에 제 삶은 팽이처럼 정신없이 흔들리곤 하지만, 그 안에서 나름의 중심을 찾아나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늘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무리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강하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흔들림 속에서도 중심을 찾아나가는 것이라는 걸 배웠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상담을 통해 스스로 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3.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학우들에게 하고 싶은 말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힘든 시간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런 시간을 지속하다보면 스스로를 지탱하는 마음의 근육이 희미해지기도 합니다. 만약 어디에도 털어놓기 힘든 어려움으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상담을 받아보기를 적극 권유하고 싶습니다. 제가 그랬듯이 상담을 한다고 나아질까 고민을 할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자백하는 일이 꺼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이라면 교내 상담센터의 프로그램을 ‘비빌 언덕 하나’로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담을 통해 스스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당면한 문제를 관리할 수 있는 수준으로 두는 것이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끝으로 오갈 데 없이 방황하던 저에게, ‘비빌 언덕 하나’가 되어준 심리상담 프로그램에 뒤늦은 감사인사를 전하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