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학년도 3회_ 우수상] 상자 열기
- 작성자박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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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상자가 있다면, 그 상자에는 개인의 추억이나 감정, 기억, 생각, 철학들이 담겨 있을 거다. 내 마음속에도 상자가 있다면, 내 상자는 튼튼한 상자인 줄 알았다. 그래서 당황스러울 일도 심적으로 우울할 일도 없을 줄 알았다.
대학교 4학년, 졸업 후 취업 준비를 해야 할 시기. 나는 사범대 학생이고 다들 그렇듯이 4학년 때부터 임용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초반에는 열심히 시험을 대비했다. 남들이 하는 것처럼 강의도 듣고, 스터디 그룹을 짜서 공부도 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내가 해내야만 하는 일이라고 느껴졌다. 5월에 있었던 교육실습생 기간도 재밌고 보람차게 보냈다. 학교에서 시간이 좋았고 나는 좋은 교사가 되고 싶어졌다.
시험을 3개월 정도 앞두고 있었을 때,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기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가끔 이유 없이 눈물이 흘렀다. 도대체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의아하게 느껴졌다. 무기력해질 때가 많아졌고, 그럴 때마다 스스로가 답답했다. 나는 빨리 괜찮아지고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학교에서 제공하는 상담 프로그램을 접했다. 상담을 받아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별것도 아닌 일로 상담을 받나? 라는 생각에 잠깐 주춤했지만, 그래도 상담을 받으면 다시 괜찮아지고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심리상담을 신청했다. 상담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지만, 조금 용기를 내봤다.
첫 상담 날, 내 감정이나 속마음을 꺼내는 게 어려웠지만, 상담사 선생님께서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다. 내가 왜 답답하고 무기력했을까, 선생님과 함께 내 감정과 상황을 되짚어봤다. 마음속의 상자를 하나씩 열어봤다. 어떤 이야기를 할 때는 힘들어서 울기도 했다. 내게 아픔이 된 과거의 기억을 열어볼 때는 좀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첫 상담이 끝나고 생각이 많아졌다. 사실은 난 상자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애써 무시하며 구석에 놓아뒀던 것 같다. 그래서 그 흠집이 난 정리되지 않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나에 대해 좀 더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 번 상담을 받았다고 해서, 내 문제가 해결되거나 기분이 완전히 괜찮아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우울하고 무기력한 날이 더 많을 때도 있었다. 하던 공부를 그만뒀고, 계속 부정적인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계획한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런 내가 싫고, 내 모습이 한심했고 답답했다. 그리고 또다시 우울해졌다. 방에 산소는 충분한데 숨을 쉴 수 없는 기분이었다. 숨이 막히고 답답했다.
그렇지만, 상담을 받으면서 숨통이 조금씩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사실 나는 내 이야기를 잘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건 너무 어려웠고 혼자 속에 쌓아두는 게 편했다. 하지만 상담을 받으면서 때로는 털어놓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애써 무시하고 있었지만, 난 불안했던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막막한 두려움과 이 길이 내게 정말 맞는 길인지 의문도 있었다. 다가오는 시험은 부담으로 느껴졌고, 빨리 취업을 해서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들이 하니까 나도 따라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상담 선생님의 도움 덕분에 무시하던 상자를 열어서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여덟 차례의 상담을 통해 나는 내 감정과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몰랐던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우울의 이유가 별거 아니고, 평범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상담을 통해 난 내가 내 자신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그동안 힘들었구나” “괜찮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자신에게 “잘했어, 그동안 잘해왔어.”, “열심히 한 거 알아”, “난 나의 속도에 맞게 천천히 가면 돼”, “쉬고 싶을 때는 쉬어도 좋아”라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자신에게 위로를 전하는 일이 내게는 큰 힘이 됐다. 그리고 상담하는 과정은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상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줬다.
상담을 받기 전에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었다. 우울하지 않았고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그때로. 하지만 상담을 받고 난 뒤 생각해보니, 굳이 옛날로 되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내가 좌절하고 힘들어했던 시간도 모두 다 나의 시간이었고 상자였다. 그래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예전에 나는 상자에서 튀어나오려는 감정이든 생각이든 모든 붙잡았다. 그래서 억지로 다시 상자에 넣고 무시했다. 하지만, 상자의 틈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상자를 열고 제대로 보기로 했다. 그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제대로 보고 정리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좀 더 성장하는 내가 되리라 믿는다. 그 모든 것이 내가 살아가고 배우는 과정이 될 것이다.
내 마음속에 상자가 있다면, 그 상자는 여전히 강철은 아닐 것이다. 튼튼하지 못할 때도, 상처가 나고 부서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난 힘들고 또 무너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상자를 열어 볼 것이다. 그 속에 있는 날카로운 내용물을 정리하고 차곡차곡 쌓아서 깨끗한 상자로 만들 수 있도록. 지금도 여전히 상자에 흠집이 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천천히 시간을 가져서 상자를 보고, 열어보고, 정리해서 정말로 진심으로 괜찮아지려고 노력한다. 가끔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자를 열어서 내 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에게 상자를 연다는 것은 나를 제대로 바라봐 주는 것이다. 그리고 혼자서 상자를 여는 것이 무서울 때, 상담을 통해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난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