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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학년도 2회_우수상] 망망대해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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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겨울이 시작될 무렵, 나는 한 번도 간 적 없는 학교 건물에 발을 들였다. 그곳에 간 이유는 간단했다. 앞으로 4년 동안 헤매게 될 망망대해에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의과대학은 예과 2년, 본과 4년 총 6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격적으로 의학을 배우는 본과는 수업과 시험의 연속이다. 교수님들과 선배님들 모두 본과는 쓰나미와 같다며 예과 때 제발 놀아두라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수십 번씩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과생인 나는 늘 의문이 들었다. 내가 정말 이대로 본과에 가도 될까?


지금까지 공부 방법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선행학습을 해두어서 학교 진도를 따라가는 것이 버거운 적이 없었다. 본 개념을 또 보고 풀었던 문제를 또 풀면 그냥 성적이 잘 나왔다. 물론 고민의 시간이 있었지만 그건 담임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께 여쭤보면 금세 해결될 일이었다. 구부러져 있어도 주어진 길만 따라가면 결국엔 종착역에 도착하는 쉬운 길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대학은 좀 달랐다. 그게 겨우 예과라 할지라도. 내 눈엔 다 비슷해 보이는 뼈 모형과 조직 슬라이드를 보고, 화면에 적힌 문제가 몇 초마다 ‘땡’ 소리만 남기고 사라지는 땡 시를 치르며 머릿속엔 줄곧 ‘정말 이렇게 하는 게 맞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나의 말에도 주변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의대생인 네가 공부 방법을 모르면 누가 알겠니?’ 같은 우스갯소리뿐이었다. 맞는 말이면서도 틀린 말 같은 그 답변을 곱씹으며 적당히 예과의 마지막 학기를 보내던 중 한 메시지를 받았다. 학습 관련 도움이 필요한 학생은 학습 상담을 받을 수 있다는 단체 메시지였다.

내게 상담은 고등학교 때 특별 프로그램으로 학급 친구들과 집단 상담을 1회차 해본 게 전부였다. 당시에는 크게 고민이 없었을뿐더러 다 같이 모여있는 자리라 그런지 크게 내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1대1로 진행되는 상담은 오히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초면인 사람에게 내 얘기를 스스럼없이 꺼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내가 먼저 마음을 열면 다 잘될 것이라는 친구의 조언을 새기며 첫 상담에 임했다.


친구의 조언이 무색하게 처음엔 어색한 모양새로 상담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어떤 문제로 상담을 찾게 되었냐는 질문에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을 말씀드렸더니 상담 선생님께서는 더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더 이야기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내 특성을 찾아야 하나 하는 마음에 조금은 당황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하나둘씩 얘기를 꺼내다 보니 정말 내가 몰랐던 나의 문제들이 튀어나왔다. 나의 대표적인 문제점은 시간 관리 능력 부족과 심리적 압박이었다. 그제야 과거를 돌아보니 고등학교 때도 인지하지 못했을 뿐 늘 비슷한 상황에 시달렸던 것 같다. 늘 옆에 있는 친구보다 잘해야 좋은 등급을 받을 수 있다는 부담감, 잡다한 생각에 매몰되어 헛되이 보내버린 무수한 시간. 사소한 가족 문제부터 친구들과 있었던 일을 곱씹다 보면 시곗바늘이 한참은 넘어있곤 했다. 문제점을 탐색한 뒤엔 선생님께서 미리 진행했던 상담 검사 결과지를 보시며 객관적인 내 모습을 이야기해 주셨다. 확 와닿는 말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말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중에 돌아보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들도 다 나의 수식어가 맞았다. 상담 과정 동안 총 2번의 학습 검사를 진행하였는데, 간단한 질문에 대답만 했을 뿐인데 나를 그대로 나타내어 주는 검사 결과가 신기했다. 나의 강점과 결점은 물론 지금까지 걸어온 길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었던 특성들도 규범, 탐색 같은 키워드로 정리해 수치로 나타내니 훨씬 보기에 수월했다. 상담에 가기 전엔 시간이 느리게 갈까 봐 걱정했는데 나에 대한 분석을 보고 얘기를 나누며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불안들을 눈물로 털어내니 금세 50분이 지나있었다. 첫 상담뿐만 아니라 진행한 5회차 모두 그랬다.


차근차근 진행되는 상담 속에서 깨달은 점은 내 안의 모든 생각과 그것에 의한 행동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상담 초반에는 정말 ‘학습’과 관련된 이야기만 하려고 애를 썼다. 심리 상담이 아닌 학습 상담이니 이외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상담에 방해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안고 왔던 사소한 습관도 그간 계속 모른 척 쌓아만 왔던 인간관계 문제도 모두 학습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 그것부터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일단 장기 목표와 단기 목표를 세우고 하루에 해야 할 계획을 세웠다. 내가 나중에 어떤 병원에서 일하고 싶은지, 그것을 위해 지금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부터 작성했다. 나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1시간 단위로 쪼개진 계획표에 꼭 필요한 시간을 색칠하고 남은 시간을 보니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할 일을 적어두는 리스트에 가까웠던 플래너 대신 시간까지 기록할 수 있는 플래너를 마련해 할 일을 쓰고 어떻게 시간 활용 계획을 써두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한 것을 강박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 그대로 실천하지 못해도 남은 시간에 맞추어 공부량을 다시 설정하면 된다는 점이었다. 적은 시간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니 지금까지 느꼈던 조바심이 줄어들어 집중하기에 더욱 수월했다. 또 한 가지 깨달은 점은 한 번에 모든 것을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한 번에 완벽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 작은 개념이나 단어 하나까지 살펴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다음에 또 보면 된다는 마음으로 1회 독에 들이는 시간을 줄여 횟수를 늘리니 머릿속에 저장되는 정보가 늘었다. 이 방식을 배우고 나니 대학에서의 공부뿐만 아니라 앞으로 평생 이어질 학습의 바닷속에서도 방황하지 않고 잘 헤엄쳐 나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더 나아가 상담은 학습뿐만 아니라 내가 겪어온 어려움을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인데 이건 실수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해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할 때 지레 앞서는 걱정에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어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었다. 상담 선생님께서는 그럴 때 내가 말을 건넴으로써 최고의 결과와 최악의 결과를 예상해 보라고 하셨다. 당연히 최선의 결과는 그 사람과 편안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고 최악의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답이 다 정해져 있는 문제인데 지금껏 고민만 한 나에게 의문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낯선 상대와 마주하는 상황에서 오래 생각하기보다는 일단 가볍게 얘기를 걸어보았다. 아직 선뜻 내 얘기를 꺼내는 건 망설여지긴 하지만 그래도 최악은 없다는 말씀을 되새기며 용기를 내어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그리고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상담 선생님의 조언대로 ‘글쓰기 명상’을 했다. 거창한 것도 없이 줄 노트에 날짜와 요일을 적고 일어난 일과 거기서 느낀 감정을 적었다. 가끔 험한 말도 쓰였지만, 끝에 가면 그 사람도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있었겠다는 이해심과 한결 편해진 마음만이 남아있었다. 글쓰기 명상을 하고 나면 감정이 완결되어 다른 일에도 쉽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상담 회차를 더 해가면서 처음엔 낯설었던 상담 시간도 점점 편해졌다. 처음엔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말을 고르느라 늦게 튀어나왔던 대답도 웃으며 하는 날이 많아졌다. 심지어는 내가 먼저 나서서 그 주에 있었던 일을 꺼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른 것도 있지만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신 상담 선생님의 역할이 컸다. 상담 선생님께서 해주시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을 보는 시각도 넓힐 수 있었다. 금요일 공강 아침을 상담 시간으로 사용했기에 처음엔 늘어지게 늦잠이나 자고 싶다는 욕구를 겨우 억누르며 상담에 갔지만, 나중엔 일찍 하루를 시작해 알차게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학습 상담을 망설이는 학우가 있다면 부담 없이 신청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모르는 내 문제를 찾는 시간은 쉽게 가질 수 없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또 앞으로 걸어갈 무수한 길에서 나침반을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 아쉬운 점은 생각보다 상담 예약을 잡기 어렵다는 것이다. 학습 상담을 진행하면서 같은 학과 친구들에게 숱하게 상담을 추천했지만, 대다수의 상담 시간이 수업 시간과 겹쳐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인기가 많아 당장 다음 주에 빈자리가 없는 경우도 허다했기에 나도 거의 연예인 콘서트 표 구매하듯이 상담을 신청하곤 했다. 따라서 상담 선생님이 늘어 회차가 확장되고 더 많은 학생에게 학습 상담의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학습 상담을 마친 나도 아직 완전한 확신은 없다. 그러나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다른 사람의 눈치만 살피며 준비운동만 하던 과거와는 다르다. 학습 상담으로 얻은 구명조끼의 버클을 채우고 본과라는 망망대해를 향해 그래도 일단 뛰어드는 것이다. 최대한 편안한 마음으로 지금까지 배우고 깨달은 것을 손안에 꼭 쥐고서, 사회에 이바지하는 의사가 될 미래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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